삼각산(三角山) 길상사(吉祥寺) 탐방기
서울 성북동, 북한산 기슭에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吉祥寺)’가 있다. 역사는 매우 짧지만 창건에 얽힌 미담이 널리 알려져 있다. 대단한 요정 자리였고, 시인 백석(白石)을 사랑했던 요정 주인이 유명한 법정(法頂)스님에게 몽땅 시주를 해서 이루어졌다는, 요즘 세태에서는 참으로 보기 드문 꿈같은 이야기라서 많은 관심을 끌었다.
하여, 벼르고 벼르다가 큰맘 먹고 찾아 나섰다. 검색을 해 보니 옛 ‘돈암동 삼선교’라 불리던 지하철 4호선 한성대 입구 역에 내려 6번 출구로 나가라는 것이다. 가끔 다니는 간송미술관 가는 출구와 같다. 6번 출구로 나가면 길상사 가는 셔틀버스가 있다지만 시간 맞추기가 어렵고, 1111번과 2112번 버스를 타고가면 간송미술관 앞에 내려 15분 정도 걸어서 고개를 하나 넘어가야 한단다. 해서 아예 택시를 탔더니 기본요금 조금 더 나올 정도로 가깝다.
성북동, 서울의 부자들이 모여 산다는 그 동네의 가운데에 길상사가 있다. 1960년대와 70년대 그리고 80년대 말까지 군사정부의 서슬이 시퍼럴 당시 한때 밀실 정치의 현장이었다던 삼청각, 그리고 청운각과 더불어 최고급 요정의 하나였던 대원각(大苑閣) 자리란다.
대원각 주인이었던 김영한(金英韓, 1916~1999)여사가 7000여 평의 대지와 건물 40 여 동 등 당시 1천억 원대의 부동산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함으로써 길상사로 탈바꿈해, 도심 속의 산사,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잠시 머무르고 싶은 곳이 됐다.
길에서 내려 일주문을 올려다보니 꽤 당당해서 부자 동네의 기에 눌리지 않을 것 같아 보기 좋다. <三角山 吉祥寺> 현판 글씨도 좋고, 절 이름도 친근감이 간다. 헌데 <길상>이란 축원한다는 뜻으로 문수보살(文殊菩薩)과 인연이 깊은 말인데, 길상사는 특별히 문수보살을 기리는 사찰 같지는 않다. 그냥 법정스님이 길상사라는 절 이름이 참 좋아서 그랬단다. 법정스님과 인연이 깊은 전남 순천의 송광사(松廣寺)의 옛 이름이 길상사이기도 해서 그런 인연으로 지은 이름이라 한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색다른 법계(法界)가 전개된다. 서울 시내인데 이렇게 조용한 곳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고즈넉하고, 경내가 잘 정돈돼 있다. 부처님께서 초전법륜(初轉法輪)을 하셨던 녹야원(鹿野苑)이 이런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조금 들어서면 마리아상을 닮은 관세음보살 석상이 반긴다. 설법전 앞에 조용히 서 있는 키 1m 80㎝의 날씬한 보살상이다. 불기 2544년(서기 2000년) 4월에 봉안했다고 새겨져 있다.
조금은 슬픈 듯, 그리고 웃는 듯, 생각하는 듯…오묘한 표정의 조각상. 천주교 신자인 한국 조각계의 거장 최종태(崔鍾泰) 씨가 조각해 세간에 화제가 됐던 바로 그 관세음보살상이다. 천주교 신자가 금어(金魚)를 자청한 셈인데, 그렇게 하여 성모상을 닮은 이 관음상은 천주교와 불교의 아름다운 만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성상이 됐다.
관음상 점안식 날 법정 스님은 관세음보살과 성모마리아는 그 상징성이 같다는 말씀을 했고, 그 자리에서 최종태 교수는 짧은 인사에서 “땅에는 경계가 있지만 하늘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땅 위에 있는 모든 종교가 울타리를 허물면 한마당이 될 것입니다.”고 했단다.
하나인 하늘의 뜻을 거스리고 땅위의 중생들이 이 곳과 저 곳으로 나누고, 내 것과 네 것을 구별하면서 자기만이 옳고 내 것만이 참이라고 좁은 소견을 내세우고 있다.
---다음은 동아일보 전승훈 기자의 취재 기사---
“관세음보살상이 머리에 쓴 관이 무엇입니까.” “화관(花冠)입니다.”
“손에 들고 있는 병은 무엇입니까.” “정병(淨甁).”
“손바닥이 이쪽에서 보이도록 만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구고(救苦).”
1999년 여름, 원로 조각가인 최종태 서울대 명예교수(80)의 서울 마포구 연남동 작업실에 법정스님이 찾아왔다. 한국가톨릭미술가협회장으로 전국의 성당에 성모상을 세워온 최 교수에게 관음상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이다.
최 교수는 “나도 짧게 (세 가지를) 물었지만 스님은 토씨 하나 안 붙이고 외마디 답으로 알려 주었다”며, “꽃관에다, 정화수에다, 세상 고통 구한다는 세 마디 말씀을 듣는 순간 작품은 다 잡혔다”고 회고했다.
최 교수는 1958년 가톨릭에 입교했지만 서울대 미대 졸업 후 3개월간 불교 교리를 배웠다. 해맑은 소녀상을 조각해온 그는 “1960년대 중반 반가사유상에서 한국의 조각가로서 추구해야 할 평생의 길을 찾았다”며, “내 신앙적 본향은 가톨릭이지만 원천은 불교였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성모상과 관음상은 영원한 어머니로서 대자대비이고 큰 사랑이며 맑음과 깨끗함, 고귀함과 온화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여성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김 추기경에게 “성모상을 만들던 내가 관음상을 만들면 천주교에서 나를 파문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김 추기경은 “일본에서도 천주교가 전파된 초기에 관음상 한 귀퉁이에 작은 십자가를 표시해 기도를 드리며 박해를 피했던 일도 있다”며 격려했다.
어느 날 법정 스님과 함께 차를 타고 서울 삼청터널을 지나면서 사람을 맑게 해주는 ‘정화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법정 스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목이 마르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의 갈증’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한 해 간격으로 세상을 떠난 두 분의 마지막 모습도 그에겐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 왔다. 법정 스님 입적 5일 전 최 교수는 삼성서울병원을 찾았다. 장익 주교(전 천주교 춘천교구장)와 동행한 최 교수에게 법정 스님은 일어설 수 없음에 “원(願)은 여전한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며 양해를 구했다. 스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며칠 후 퇴원할 것”이라며 “강원도 산골 집에 가서 눈 구경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법정 스님이 눈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한 것은 죽는 날까지 순수함, 맑고 향기로움을 추구하고자했던 바람이었던 같다”고 전했다.
최 교수는 “김 추기경과 법정 스님의 죽음을 직접 눈으로 보니, 이분들은 진정 죽음을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대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종교와 예술이 분리되는 21세기에 두 분을 만나 종교와 예술, 삶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은 커다란 행운”이라고 고백했다.
이런 미담을 떠올리며 관음상을 살피면 관음상에 더 없는 친근감이 가서 머리 숙여진다. 넋을 잃고 관음상을 바라보다가 그 앞을 지나면 본전인 극락전이 다가온다. 옛날 그 요정의 건물인지 겉모습이 절집 같지 않은데, 단아한 글씨의 극락전(極樂殿)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일체의 단청이 없어 무척 우아해 보인다. 극락전 앞에 서서 잠시 백석을 생각하고 김영한을 생각했다.
[여승(女僧)] 백석
여승은 함장하고 절을 한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 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山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김영한과의 사랑 이야기를 닮은 백석의 시이다. 어쩐지 김영한의 삶을 예감이나 한 듯한 스토리이다. 백석은 김영한을 애칭으로 자야(子夜)라고 불렀다고 한다. 중국 변방의 전쟁터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이야기인 자야오가(子夜吳歌)라는 당나라 이백(李白)의 시에서 따 왔단다.
김영한은 법정스님의 대표적인 산문집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공덕주가 되고자 전각과 절터를 내놓았으나 법정스님이 사양하는 통에 10년에 걸쳐 설득해서 그 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극치를 보는 것 같다.
불교에는 삼륜청정(三輪淸淨)이란 말이 있다. 즉 베푸는 자(施者)와 받는 자(受者)와 보시한 물건(施物), 이 세 가지가 깨끗할 때 비로소 참된 보시가 이루어짐을 말한다. 길상사야말로 삼륜청정이 꽃피운 사찰인 것 같다. 위의 시처럼 사랑했던 사람을 가슴에 묻고 일생을 그렇게 살다가 다 내려놓고 간 한 여인의 깊은 심성, 그리고 평생을 ‘무소유’로 일관한 선승의 올곧음이 그대로 절에 배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김영한 여사
서울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16세에 집안이 몰락해 스스로 한성 기생 ‘진향(眞香)’이 됐다.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녀는 타고난 미모에 시와 글, 글씨, 그림, 가곡과 무용 등 다재다능해서 그 명성이 자자했다. 23세 때 김영한은 흥사단과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스승 신윤국(申允局)의 도움으로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스승이 투옥됐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해 함흥감옥을 찾아갔지만 면회를 할 수 없었다. 이에 다시 함흥에서 기생의 길로 들어섰다. 함흥기생이 되면 혹시 지역유지의 도움으로 스승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 때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로 있던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 때가 1936년이었다. 그리고 서울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리고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3년간의 동거생활을 했다.
김영한이 사랑했던 시인 백석
그런데 백석의 부모가 이 사실을 알고, 못 마땅하게 생각한 나머지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켰다. 그러나 신혼 첫날밤부터 도망치기를 여러 차례, 부모에 대한 효심과 연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 갈등하다가 이를 벗어나기 위해 김영한에게 만주로 도피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그녀가 백석의 장래를 걱정해 거절하자 백석은 1939년 혼자 만주로 떠남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 영원한 이별이 됐다.
해방 후 만주를 유랑하던 백석이 귀국했으나 이번에는 남북분단이 둘을 갈라놓았다. 그 후 백석은 북한 체제 속에서 핍박을 받으며 살다가 1959년 이후 압록강 인근의 양강도 삼수군의 농장으로 배치돼 농사일을 하면서 문학을 지도하다가 1995년 1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한편 서울로 돌아온 김영한은 1953년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시, 수필 등을 더러 발표하기도 하다가 요정인 대원각을 운영하면서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그러나 차츰 생을 마감해야 할 때가 다가옴에 사무친 그리움이 더 치밀어 올라온 때문일까, 그 동안 품어왔던 이야기를 1995년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과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은 이름(창작과 비평)>에 담아 출간해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죽음이 임박해지자 1997년 자신이 가지고 있던 현금 2억 원을 출연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했고, 같은 해 대원각 대지와 건물 일체를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길상사를 설립케 했다.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가 개원하던 날, 김영한은 법정스님으로 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길상(吉祥)은 ‘좋은 생각, 좋은 뜻, 좋은 일이라는 뜻’이고, ‘길산존(吉祥尊)’은 ‘좋은 조짐을 주실 존자이시여’라는 뜻이라서 결국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 혹은 문수보살을 뜻하게 된다. 하니 ‘길상화’는 부처님 같은 상스러운 꽃이란 고귀한 이름이 되겠다.
그리고 그녀는 그날 수천 대중 앞에서 짧은 말을 남겼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던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2년 뒤 1999년 11월 14일 84살의 생을 살다 간 자야, 그녀는 그리움을 간직한 채 하루 전날 목욕재계하고 절에 와 참배하고 생애 마지막 밤을 길상헌(吉祥軒)에서 묵고, “내 모든 재산이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 해. 나 죽거든 눈 오는 날 길상사 뒤뜰에 뿌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다비 후 유골은 유언대로 길상헌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졌단다.
젊었을 적의 백석을 그리워하며 기다림과 육신의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모든 것을 희사한 가벼운 마음으로 열반(涅槃)에 들었기에 그녀의 영혼은 틀림없이 극락에 갔으리라. 그리고 거기 먼저 가 있을 백석을 만나 그렇게 기다리고 소원했던 만남이 이루어졌으리라 짐작된다.
이런 김영한의 삶을 잘 아는 법정스님은 그녀의 뜻을 거스르지 않게 길상사를 일구어놓았다. 자칫 막대한 재산에 휘둘려 잡음이라도 생길까 사려 깊게 처신한 것이 훗날 좋은 귀감이 됐다. 다음은 언젠가 길상사 법회에서 법정스님이 직접 밝힌 말이다.
“……잘 아시다시피 저는 이 곳 길상사에 내 개인의 방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처럼 이 절에 나올 때면 주지실에 잠시 머물다 갈 뿐입니다. 지금껏 저는 이 절에서 하룻밤도 묵은 일이 없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 음악회에 참석 하느라 늦게 서울을 떠나는 날에도, 심지어는 밤 12시 가까이 늦어져 피로 때문에 제 처소까지 가기 어렵다 싶으면 근처 모텔에 머물더라도 이 절에서 자지 않고 갑니다. 이것은 제 개인의 질서입니다.
제가 만약 이 절에 기대게 되면 절 살림이 이원화됩니다. 그 것은 송광사에서 지내면서 보고 느낀 겁니다. 주지가 엄연히 있는데 방장스님이 계시면 주지가 제 노릇을 못합니다. 절은 주지가 모든 책임을 집니다. 대중이나 재산을 관리하고 지킬 책임이 모두 주지에게 있습니다.……
만약 제가 이 도량에 살게 되면 저는 간소하게 살고 싶은데 이부자리를 해온다 옷가지를 해온다 해서 번거로운 일들이 많이 생기기도 할 것입니다. 제가 이 도량에서 방을 차지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법에 어긋납니다. 더군다나 맑고 향기롭게 살고자 하는 염원으로 이루어진 도량이라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교단의 전통적인 규범에 어긋나서는 안 됩니다.……”
절터를 시주한 사람이나 절을 가꾼 스님이나 참으로 범상치 않은 일화라서 속세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에겐 그저 동화와 같은 이야기로 가슴을 울린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극락전 뒤로 올라가면 계곡 좌측 건너에 길상화의 공덕을 기리는 작은 비석이 호젓이 있다. 소박한 작은 다리를 건너 공덕비 앞에 서니 누군가 바친 작은 꽃병들이 늘어서 있다. 그리고 그 뒤가 길상헌 같다.
그리고 되돌아 나와 계곡 따라 뒷길로 쭉 올라가니 왼편 산비탈엔 작은 건물들이 층층이 있다. 아마 선방인 것 같다. 그리고 길상선원이 있고, 더 이상은 올라갈 수가 없다. 스님들의 거처이기 때문이다.
길상사 탐방을 마치고 나오려니 가슴엔 말 못할 감회가 일어 온 몸을 휘감는다. 절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그렇고, 길상사가 있게끔 했던 맑고 향기로운 이야기들이 가슴 뿌듯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헌데 어떻게 알았는지 외국인들도 많이 찾아온다. 관광차 왔다면 볼 곳이 많을 텐데 굳이 이 후미진 골짝의 산사를 찾아왔을까. 아마 그들도 이 향기로운 이야기들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고, 그들도 또한 아름다운 심성으로 찾아온 것이리라.
2011, 9, 7(수요일) 나무관세음보살,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진심으로 합장합니다. 아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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